1. 돌이 운다.
그러니까 1966년 여름, 대입에 낙방하고 눈치밥을 먹고 지내던 재수생 주제에 소갈머리없이 홍도에 놀러 갔습니다. 그것도 대학에 입학하여 여름방학이 되자 금의환향한 친구들과 어울려 홍도로 놀러 갔던 것입니다. 요즘에는 목포에서 홍도까지 쾌속선으로 2시간여만에 바람처럼 물살을 헤치고 갈 수 있지만 그 때 그 시절에는 목포에서 출발한 여객선이 통! 통! 거리며 가다가 눈에 보이는 모든 섬들은 다 기웃거렸습니다. 그냥 기웃거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람도 싣고 내리고, 쌀가마니를 비롯한 화물들도 져나르고 져오르고 그저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12시간을 가야만 닿는 곳이 홍도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마땅한 숙빅시설도 없었을 뿐 아니라 설사 있다한들 돈을 내고 그곳에서 숙박을 할 정도의 여유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나름 모두들 당시 광주에서는 내노라는 자식들임에도 불구하고 군용 대형 텐트 둘러메고 항고(지금은 코펠이라고 하는데 당시에는 군대 식기를 일본어로)와 냄비 등의 취사도구를 챙겨 등에 들쳐맨 꼴들이 지금 생각하면 거의 피난민 수준의 몰골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세대들이 늘 그러하듯 가장 목청 좋고 솜씨 좋은 녀석이 그 피난민 대열에서 유일하게 폼나게 어깨에 기타를 어슷하게 메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그저 어디든지 엉덩이만 붙이면 "조개 껍질 묶어~~" "긴 밤 지새우고 ~~" 등등의 노래를 목청은 터져라, 손바닥은 불이 나게 쳐대면서 키타 주위에 둘러 앉아서 노래를 불러댔습니다. 간판에 둥글게 모여 앉아서 그렇게 놀다보면 이미 대학에 입학하여 폼나게 가슴에 대학 배지, 그 중에서도 'VERI LUX TAS MEA'(맞나요?)가 쓰여진 해골표 배지를 차고 있는 친구 덕분에 재수생이면서도 마치 스스로 대학생으로 착각하는 즐거움도 있었습니다.
홍도 몽돌 해변에서 못 마시는 술에 취해서 문득 바라본 바다는 파도 소리만 들릴 뿐 온통 칠흑 어둠이었습니다. 그런데 파도 소리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 파도에 휩쓸려 돌이 구르는 소리는 파도 소리까지도 삼키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재수생의 설움이 복받쳐 올랐습니다. 젊음의 절망, 어쩌면 내년에도 친구가 가슴에 당당하게 차고 있는 그 해골표 배지는 영원히 달지 못찰 것 같은 그 절망감, 그리고 소갈머리없이 여기까지 덩달아 따라온 자신에 대한 미움이 파도처럼 가슴에 밀려 옵니다. 그리고 바로 돌이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파도에 씼기어 오르내리면서 울어대는 돌 울음 소리가 가슴을 후벼 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절망의 젊은 시절, 어줍잖게도 그 감정을 담아서 시를 썼습니다. 지금은 기억도 가물거려 전체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방파제 넘어 푸른 종소리는 들리고 / 돌이 파도에 구르면 운다"고...... 한 귀절만 어설프게 남아있을 뿐.
2. 돌도 우는가.
그러니까 2008년 여름, 강원도 영월에 동강국제사진전 워크숍을 참가하였습니다. 최광호 작가의 '내 마음의 낙서'라는 주제의 강연을 듣고 우리 일행은 서둘러 그날 묵을 팬션으로 들어섰습니다. <동강 별자리>라는 멋진 이름의 팬션 바로 옆에 맑고 투명한 동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마당에 나가 음악을 틀어 놓고 술과 음료수를 마시며 사진을 논하고, 인생을 돌아보고, 세상을 훑어보고 있는데 점차 어둠이 깔리면서 강물 소리가 바람 소리에 묻어 볼륨이 커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더니 환청임에 분명한데 42년전 홍도 해변에서 들었던 그 돌 울음이 들려 옵니다.
그래, 역시 돌은 지금까지도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울음이 마치 그 많은 세월에도 지워지지 않을 상처로 남아서 선명한 자욱으로 기억의 저편에서 다시 들려온 것입니다. 수고스럽게 끝까지 인내를 가지고 이 글을 읽은 당신, 당신이 듣기에도 그리고 당신이 생각하기에도 진정 돌이 우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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