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송세월하는 나는 봄이면 자전거를 타고 남한산성에서 논다.
봄비에 씻긴 성벽이 물오르는 숲 사이로 뻗어 계곡을 건너고 능선 위로 굽이쳤다.
먼 성벽이 하늘에 닿아서 선명했고.
성안에 봄빛이 자글거렸다.
나는 만날 놀았다.
옛터가 먼 병자년의 겨울을 흔들어 깨워,
나는 세계약에 짓밟히는 내 약소한 조국의 운명 앞에 무참하였다.
그 갇힌 성 안에서는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이 한 덩어리로 엉켜 있었고,
치욕과 자존은 다르지 않았다.
말로써 정의를 다툴 수 없고,
글로써 세상을 읽을 수 없으며,
살아 있는 동안의 몸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을 다 받아 내지 못할진대,
땅위로 뻗은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으리.
김훈의 <남한 산성> 4쪽....